Remastered Fanatic

잡설 | 2007/01/26 00:56


에픽 하이의 타이틀 <Fan>에 대해 "이건 무조건 사 줘야 된다"고 블로그에 써 놓긴 했지만 솔직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힙합 씬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왜 JU가 한국 최고의 DJ인지 실감이 나고, JU가 빠져나가고 난 후에도 가리온이 유지하는 포스, 특히 <무투>의 압도적인 힘이 심장 깊이까지 와닿는다. 그렇다고 해서 헤비 리스너도 아닌 내가 감히 그들에게 "가리온에 비하면 에픽 너네는 X병신이네효"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 에픽에게는 또 에픽의 색깔이 있고, 에픽만이 갖는 음악 씬에서의 의미란 게 있고...... 그걸 감안한다면 에픽이 가리온보다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다시 <Remapping>에 대한 얘기. 시험기간마다 나는 시험을 일종의 "쇼"라고 표현한다. 사실 이건 시험 뿐만 아니라 한의과대학 생활 자체에 대한 내 (음울한) 관점이기도 하다. 신인 아이돌은 PD나 연예계의 실력자에게 적절한 뇌물을 헌납함으로써 쇼에 출연할 자격을 얻는다. 신인 아이돌이 TV 쇼에 출연해서 얻는 금전적인 이익은 거의 없다. 물론 경험이 된다든가 배울 게 있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쇼에 출연해서 웃고 떠들고 가끔씩 심각한 척 하다가, 자존심이니 배알이나 다 버리고 자신의 치부와 모든 망가진 모습을 떠벌리듯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몇 년 있고 나면 이제 신인 연기자는 스타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입장권을 얻는다. 그 입장권이 있으면 출연료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인생이 달라진다. 신인 아이돌이 TV쇼에 출연하는 것은 그 TV 쇼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스타가 되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를 밟고 있을 뿐이다.

한의과대학은 어떨까? 이것도 역시 쇼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학생들은 매년 학교에 1천만원 정도를 뇌물을 '등록금'이란 명목으로 헌납함으로써 쇼에 출연할 자격을 얻는다. 그 큰 돈을 쏟아부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금전적인 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경험이 된다든가 배울 게 있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학교에 다니면서 웃고 떠들고 시험이니 유급이니 하는 소리에 가끔씩 심각해지다가, 자존심이니 배알이니 다 버리고 자신의 치부와 모든 망가진 모습을 떠벌리듯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육 년을 버티고 나면 이제 한의과대학 학생은 한의사라는 이름의 쁘띠부르주아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입장권을 얻는다. 그 입장권이 있으면 그의 사회적 지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인생이 달라진다. 한의과대학 학생이 한의과대학에 다니는 것은 한의과대학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한의사가 되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를 밟고 있을 뿐이다.

에픽이 새로운 앨범에서 <Map>을 <Remapping>하는 것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에서 나는 사 년이나 되는 의미없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공부도 참 못한다. '누굴 탓하려는 게 아니'라는 뻔한 핑계를 대진 않을 것이다. 지금 나는 누구를 탓하려고 하는 중이다. 그러나 한의학 자체의 학문적 정체는 무엇인가, 한의학이란 과연 현대 사회에서 가치가 있는 학문인가, 정말 이 학문을 통해 내가 사람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어떤 통계적 근거도 없는 이 기술을 이용해 사람에게 손을 댄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지는 않을 것인가....... 이 고민을 나의 선학들이 해결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사 년간의 고민을 통해 이 고민들이 해결되었는가? 물론 아니다. 그저 이제 곧 한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그 압박 때문에 억지로 공부를 시작했을 뿐이다.

에픽의 진의가 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해석하기를, 아마 그들이 <FLY>보다 <I Remember>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Remapping을 시작했으리라 보았다. 이는 그들이 <FLY>보다 <I Remember>가 '옳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의미이다. 그럼 어떻게 '옳다'는 결론을 얻었는가? 팬이 있었기 때문이고, 비평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FLY>에 열광하는 박순희들과 그에 비판적으로 반응하던 마니아들이 에픽으로 하여금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사회적으로' '양심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 그 자극으로부터 시작되는 치열한 고민,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Remapping>을 시작하게끔 한 시작이었다면......

나에게는 어떤 자극이 있는 것일까? 한의과대학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있어 단순한 쇼에 불과하다면, 이 쇼를 <Remapping>하여 현실로 녹여내기 위해 나는 어떤 '옳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어려운 일이다.

2007/01/26 00:56 2007/01/26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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